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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덜컹.
기차가 건네는 리듬은 불친절합니다.
그 엇박자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 즈음,
창가 너머로 이제 익숙한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해가 뜬 낮, 밖은 모든 게 잠들어가는 겨울입니다.
우진이 앉아 있는 곳은 고등학교 때 살았던 동네로 가는 기차 안입니다.
기차는 남은 사람이 몇 없어 적막하기만 합니다.
하긴, 이제 그 동네 전체가 철거 예정이라 했던가요.
본래도 큰 동네가 아니었지만,
학생 수가 줄고 하나둘씩 떠나며 자연스레 유령 마을이 되었습니다.
5년, 그리고 부서지는 마을.
당신 역시 죽은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든 장소에 지레 겁을 먹고, 뒷걸음을 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
손에 들린 편지가 유독 무겁습니다.
몇십 번이고 읽었을 그 편지가요.
이 모든 게 신기루 같아 괜히 편지에 눈길이 갑니다.
...
천서가, 천서가…
익숙하고도 그리운 이름입니다.
닳도록 불러도 사라지지 않는 게 이름인데, 그 이름은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니까요.
5년 전, 졸업식 바로 전날 천서는 죽었습니다.
이별은 한순간이고 인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누구에게서 온 건가요?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구겨질 때까지 읽은 편지의 필체는 천서의 것이 확실합니다.
주소 하나 없이 갑자기 우진의 집 앞에 떨어진 편지.
어느 누가 칠 수 있는 장난도 아닙니다.
...
기차는 잡념 하나 없이 목적지를 향해 달립니다.
당신은 어째서 이 편지를 따르고 있는 건가요?
그곳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편지의 주인까지도.
속은 셈 치고 가는 동네는 예전과 많이 다른 모습일 겁니다.
재개발 후에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되어있겠죠.
떠드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기차.
산길과 바닷길을 달려 창문의 풍경이 휙휙 달라집니다.
너른 햇살에 천천히 눈이 감겨요.
수마에 사로잡힙니다.
어차피 우진이 도착할 곳은 종점, 졸음을 굳이 참을 필요는 없습니다.
편지를 받고 잠을 설친 탓일까요?
창가에 기댄 머리가 점점 아래로 떨어집니다.
덜컹, 기차의 리듬과 의식이 희미해집니다.
.
.
.
.
.

끔뻑,
그리운 목소리에 눈이 천천히 떠집니다.

비몽사몽 정신을 간신히 일깨우면 교실을 채운 학생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눈앞의 천서까지도요.
모두 교복 위로 사복을 덧대어 입고 있습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0 |
| 판정결과: | 실패 |
…주천서?
상황파악을 하는 것도 잠시, 평소에 자주 꾸던 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보냈던 마지막 겨울.
졸업식과 봄의 시작을 기다리던 12월의 그 날.

동네로 가던 길 마음이 뒤숭숭했을까요, 이런 꿈을 꾸다니.
눈앞의 천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자를 돌려 당신을 마주 봅니다.




...어, 네 꿈.

와~ ......내 무슨 꿈??
빨리... 응? 뭔데? (기대감에 차있는 표정으로)



(더 모질게 말했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 ...꿈인 걸 알면서도 자꾸 말문이 막힙니다.)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 사이 ‘졸업’, ‘겨울 방학’, ‘대학’, ‘폐교’라는 말이 간간이 들립니다.
그중 가장 들뜨게 토론 중인 주제는 폐교입니다.
기억해보면 이맘때 즈음부터 학생 수도, 동네 주민 수도 빠르게 줄었던 것 같아요.
우진를 힐끔 쳐다보던 천서는 이어 말을 꺼냅니다.




...학교가 사라진다고, 다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당장은... 아마도.

사라지는 건 아녀도... 기억 못 할 수도 있잖아~
가려고 했는데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아, 맞다. 거기 없어졌지~ 하고 말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인데, 사서 걱정은.



다른 게 어딨어? ....뭐, 감성이 조금 다르다고 해두자~
.......그래서 말인데?

(대답없이 천서를 봐요.)

우리 이제 마저 정해야지~ 졸업식 때는 무슨 꽃다발을 받을지~
무슨 말인지 되새기면 문득, 우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약속 하나가 떠오릅니다.

어떤 이유였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서로의 졸업을 축하해주자는 의미이었을 겁니다.
결국 건네지 못한 그 꽃을요.
마지막으로 우진가 건넬 수 있던 꽃은 희고 흰 국화꽃 한 송이가 전부였습니다.


... ...개뿔, 됐어... 그런 거.

아, 뭐가 됐어~야? ....나는 받고 싶다니까?
응?? 응?? 우진아~ 응~? 아~ 왜~~ 꽃 예쁘잖아~~ (그렇게 말하며 팔을 흔들었다)

(조금 욱해서, 말을 뱉고 나면...)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 ...필요없다고, 나도.
(까칠하게 나온 말을 되돌릴 수 없어 고개를 숙입니다.)

나 못 믿어? 응? 우진이 네가 주는 거라 평생 안 시들게 한다니까?




.....근데도 안될까? 응? 우진아?

...예쁜, 꽃... 같은 건 잘 몰라.
... ...
...나중에... 딴 말하지마. 실망했다거나.

...그래서 뭐로 줄 건데?
응?? 응???

비밀인데, 바보.

지금 말 안 해주면 졸업식까지 못 기다려~

(손을 뻗어, 천서의 앞머리를 넘겨주듯 건드리다가.)
...아는 꽃은 많이 없는데... ...백합은, 어때...
...너랑 닮았는데.

내 기억에.. ...백합 엄~청 예쁜데~
...진짜? (키득대며 웃었다)

... ...너도 그렇잖아.

......우진이 너는 가끔.. ...나를 놀려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조금..~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가리고 웃었다)

...그랬을, 지도... ... (지금 표정이 어떻지? 웃고 있나.)
(괜히 손으로 입가를 가립니다.)

천서는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당연하죠, 우리의 기억은 그날에 멈춰있으니까.
June 12, 2023 8:31PM :“야, 졸업식 때 우리 집에 올 사람? 졸업하면 보기 힘들 거잖아.”
한 무리가 우진과 천서에게 다가오며 친근히 묻습니다.
이 역시 익숙한 얼굴이에요.
천서가 죽었던 날, 저 환하게 웃는 얼굴에선 상상도 못 할 표정을 지었던 친구입니다.
우린 친구의 집이 아닌 울음소리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졸업식을 마무리했습니다.
서로 연락을 끊었죠. 대화의 주제는 늘 천서에 멈춰 움직이지 않았으니.
우울은 어째서 나눌수록 커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왜?? 전에 같이 신기록 깨는 거 재밌다고 좋아했잖아~



...조금 떨어진다고 죽... ...아니, 큰일 나는 것도 아닌데.

물론, 이곳은 그저 꿈이지만…
어째서인지 전부 마주하기가 힘드네요.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서 그래~ (다른 애들한테 들리지 않도록 손으로 가리고 작게 속닥였다)
그 시끄러운 교실 속, 천서가 우진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우리가 이런 대화도 나누었던가요?


입을 떼려던 찰나, 부드럽지만 아무 감정 없는 기계음이 울려 퍼집니다.
.
.
시야가 흔들리고, 또 흐릿해집니다.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해요.
마지막으로 본 천서는 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요.
번쩍, 눈을 뜨면 다시 기차 안입니다.
눈가가 시려오는 것은 기분 탓일까요.
기차는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습니다.
몇 없는 승객들도 짐을 챙겨 하나둘씩 자리를 뜹니다.
우진이도 나가야겠어요.

(...그래도 몸은 자연스럽게 움직여, 기차에서 내립니다.)
밖으로 나가면 익숙한 역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동네를 떠날 때도, 이삿짐까지 모조리 옮긴 후에도 지나왔던 역입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93 |
| 판정결과: | 실패 |
...
(잠이 덜 깨서 머엉...)

드문드문 천서와 나눴던 대화가 생각나지만, 오래전의 일이라서 그럴까요.
닳은 기억은 좀처럼 쉽게 떠올릴 수 없습니다.

(얼핏,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은 있는데...)
(꿈도, 천서를 떠올리는 것도, 왜 여전히 버거운지.)
(일상에 너무 녹아 들어서 괴로웠다지만, 괴로웠던 만큼 기억도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억이었을까, 떠올리는 것 조차 버겁게만 느껴집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자, 어쩐지 헛웃음이 나올 것만 같습니다.
당신을 무얼 바라고, 무얼 생각하며 여기까지 온 건가요?
5년 전 죽은 천서로부터의 편지라니….
누군가의 지독한 장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흰 입김이 퍼집니다.
쌀쌀한 날씨에 편지를 잡은 손이 시려와요.
얼마나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떤 모습으로 사라질지.
철거 전 마지막으로 동네를 살필 수 있습니다.

(동네의 풍경을 봅니다. 이후로 얼마나 변했을지.)
더듬더듬 익숙한 기억을 끄집어내면, 걸음은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 떠납니다.
역을 지나 인도를 따라 걸으면 굴착기나 큰 트럭, 그 외 철거 작업을 위해 모인 사람과 장비들이 보입니다.
그중 한 사람이 우진을 힐끗 보더니, 잠시 손을 들고 소리칩니다.
June 12, 2023 8:47PM :“두고 오신 물건이라도 있어요?”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 ...아.
June 12, 2023 8:48PM :"이 앞이 철거해야 해서 위험하거든요. 필요한 게 없으면 안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두고 온 게 있어서요.
금방 다녀올게요, 안 될까요?
June 12, 2023 8:49PM :"아.. 뭐 그렇다면야,"
“오전에는… 어차피 준비하느라 상관없지만. 오후부터는 마을 전체를 걸쳐 철거 작업을 시작합니다. ”

June 12, 2023 8:49PM :“밤에는 작업도 쉬고, 마을 전체를 닫아두니 해가 지기 전에 나와주세요.”
“위험하니까 철거 중인 곳 주변에도 오지 마시고요.”
본격적인 철거 시작일은 오늘이었나 봅니다.
해가 지면 모든 작업이 멈춘다고 합니다.

겨울의 이른 밤이 되기 전에 금방 둘러보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오래 추억에 잠겨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에요.

조금 더 걸어가면 기찻길과 신호등이 놓인 길이 보입니다.
마지막 기억보다 풀은 더 우거져 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이 기찻길을 건너가는 것이 하나의 놀이였고,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죠.
그때보다 더 커버린 발을 옮기려 할 때면, 길 너머 전봇대 아래…
우진이 아주 잘 알고 있는 복장이 보입니다.
아득히 멀고, 또 가까운 곳에서.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78 |
| 판정결과: | 실패 |
... ...?
(겨울 공기에 눈이 시려, 잠시 눈을 깜빡입니다.)
(뭐지? 잘 못 본 건가...?)
(다시 길 너머를 바라봅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4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익숙한 교복, 그리고 익숙한 머리 색.
기억이 멈춘 그 뒷모습 그대로.
저건… 천서의 뒷모습과 같습니다.

언뜻 돌아본 그 옆모습은 완전히 닮아있어요.

…주천서?
상대는 우중충한 거리를 유유히 걸어갑니다.

(서둘러 길 건너로 뛰어갑니다.)
그 순간, 기차가 들어온다는 경보음이 울립니다.

덜컹, 덜컹… 안전대가 내려가면 기찻길은 걸어갈 수 없게 막힙니다.
순식간에 불어오는 바람과 나부끼는 머리카락.
요란한 소음과 함께 기차가 지나가고, 아까 그 거리에는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전봇대 아래의 천서는 그저 환상이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기차에서부터 무언가 꿈을 꾸듯 감각이 떨어집니다.

...잠이 덜 깨서...
다시 기찻길을 건너자 자주 걷던 길이 보입니다.
정리되지 않은 검은 선들이 늘어진 하늘, 낡은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음식점, 문방구와 학교로 가는 골목길…
모두 그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아니, 모두 하나같이 낡고 어딘가 부서져 있습니다.
쥐죽은 듯이 조용한 거리에는 단 한 명, 우진만이 숨을 쉬고 있어요.
푸른 하늘 아래 건물들은 흰 입김과 겨울이 스며 더욱 해묵어 보입니다.

... (평소라면 오싹하다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묘한 추억에 잠겨, 해묵은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습니다.)

| 기준치: | 70/35/14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그 조용한 거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분명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합니다.)
(...이상하다거나, 무섭단 생각은 들지 않고.)
(...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이 목소리는 어쩐지 앳된, 그리고 웃음을 가득 머금은.
편지의 주인인 천서의 것입니다.
목소리는 학교로 가는 골목길에서부터 울려 퍼집니다.
이쪽이야, 이쪽…
장난스러운 그 목소리의 주인은 확실하게 천서입니다.
…잘못 듣고 있는 걸까요?
하지만 5년 전, 지나치게 비슷하고 생생한 그 목소리가 우진를 어디론가 이끕니다.

(점점 걷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우진이 그 골목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면 담쟁이넝쿨이 가득한 담벼락이 보입니다.
이 길은 학교 뒷문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었죠.
목소리는 학교 쪽에서 들리나 싶더니, 어느 순간 끊겨 사라지고 맙니다.
역시, 그건 어느 환청에 불과한 것이었을까요.

| 기준치: | 85/42/17 |
| 굴림: | 24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담쟁이넝쿨이 뒤덮인 담벼락.
수많은 필체의 낙서들이 보입니다.
그리고 편지의 필체와 같은, 유언처럼 남기고 간 말도 새겨져 있습니다.
더듬더듬 손을 짚어 보면 바래진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아래, 작은 글이 하나 더 보입니다.
...
5년 전, 그러니까 잊고 있던 추억입니다.
우리가 그린 미래에는 둘이 함께였던가요?
손끝에 닿는 문장 역시 곧 철거되어 사라지겠죠.
…잡념을 지우고 학교로 갑시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고, 둘러보아야 할 곳은 많으니까요.

(뿌리치듯 발걸음을 돌립니다.)
계속 앞으로, 앞으로 움직입시다.
과거에 멈추지 말고요.
...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걸으면.
우진이 3년을 보냈던 학교가 보입니다.
우진이 졸업한 후 바로 폐교가 되었다고 했었죠.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고, 운동장의 잔디는 무성히 자라 풀밭이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부재가 느껴지는 학교는 숨이 꺼진 듯 고요합니다.

(...당시엔 어땠더라.)
(...폐교 같은 건,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 ... (왜 사람이 없으면 낡아버리는 걸까.)
(건물이나, 물건이나... ...)
(묘한 기분으로 학교를 둘러봅니다. 이렇게 작았던가, 싶어서.)
운동장을 가로질러 실내로 들어가면 모든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마지막 학년을 보냈던 곳은 3층이었습니다.
오래된 복도는 삐걱삐걱, 낡은 소리를 냅니다.
교무실, 미술실, 음악실… 천천히 지나가는 교실 속은 엉망입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86 |
| 판정결과: | 실패 |
... 먼지가 엄청 많네. (당연함)
그런데 이상하게도…
3층으로 향하는 그 계단, 먼지가 쌓인 그 계단에 누군가의 발자국이 찍혀있습니다.
발자국은 우진이 쓰던 교실로 이어집니다.

(계단에 남은 발자국 위로 자신의 발을 올려봅니다.)
...설마.
(그렇게 중얼거리지만...)
(단번에 계단을 올라갑니다.)
(발자국을 따라서.)
어색할 정도로 조용한 그 복도를 지나자 우진이 쓰던 교실 문이 보입니다.
드르륵, 낡은 문을 열면 마지막 기억 그대로의 교실이 늦은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낡고 엉망인 이 학교 속, 이 교실은 유독 멀쩡하고 정갈해요.
질서 있게 정돈된 책상과 창문에 달린 조금 바랜 커튼.
그리고…

(무언가에 홀린 걸까.)
(...무엇에?)
(천천히 교실 안을 둘러보다, 칠판에 눈길이 닿습니다.)
칠판의 낙서 역시 5년 전 그대로입니다.
나중에 커서도 연락하자, 성공해서 만나자, 분식점으로 5년 후에 집합…
그 사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글이 보입니다.
졸업식 전날, 마지막으로 교실을 쓰며 다 함께 적었던 그 낙서.

당연히 천서의 것도 섞여 있겠죠.
그러니까, 저 낙서는 당연하고도 평범한 졸업 날의 인사입니다.
다시, 다시…. 왜 지키지 못한 말들은 늘 무겁고 다정한가요.

(욱하는 마음을 누르려는 듯, 괜히 날 선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칠판에서 고개를 돌립니다.)
(고개를 돌리면, 시야에 보이는 것은 책상이겠죠.)
(...내가 앉았던 자리, 그리고... 주천서가 앉았던 자리도.)
(눈에 바로 보일까.)
널브러진 다른 교실의 책상들과 다르게 이 교실의 책상만은 줄을 지어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우진의 자리로 가면 익숙하고도 사뭇 달라 보이는, 쇠에 녹이 잔뜩 생긴 책상과 의자가 보입니다.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 |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천서가 건넸던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그렇게 말하는 천서도 바로 앞자리였지만요.

(그 기억에, 반사적으로 혼잣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말하며 매번 뒤를 돌아보며 웃던 얼굴이 선명하게 생각납니다.
...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마냥 좋은 기억만 있던가요?
시험이나, 어쩌다 혼이 났던 일이나, 아님….
그렇게 쥐어 짜낸 기억의 끝은 모두 천서입니다.
천서의 자리를 보면 검게 시든 꽃이 잔뜩 올려져 있습니다.
벌레 몇 마리가 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어요.
원래는 희었을 그 꽃의 이름은 떠올리지 않기로 합시다.

... ...새 꽃을, 가져올 걸.
(말을 마치곤 입술을 꽉 깨뭅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올 것 같아서.)
(어차피, 철거될 건물.)
(사라질 공간.)

(... ...누구 때문에 감성적이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도 책상에서 눈을 뗍니다.)
(교실 뒤편의 사물함도, 그대로인가?)
자물쇠가 그대로 걸린 사물함도 몇 보입니다.
우진이 쓰던 사물함을 열면 텅 비어있어요.
그렇죠, 모두 버리고 떠났으니까.

(천서의, 사물함은?)
괜히 천서의 사물함을 열어보려 하면…

| 기준치: | 60/30/12 |
| 굴림: | 5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덜컹, 닫혀 있던 문은 힘을 주자 쉽게 열립니다.
텅 비어있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편지 한 통이 놓여있습니다.

...편지?
...러브레터인가, 인기 많았으니까. (괜히 농담 섞인 혼잣말을 하면서, 편지를 집어 듭니다. 세월감이 느껴질까요?)
자세히 살펴보면 우진이 어제 받은 편지지와 동일한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놓은 것처럼 새것 같아요.

죽은 천서에게서 왔던 편지와 비슷한 모양을 한 편지.
접힌 편지지를 펼치면 짧은 글이 보입니다. 익숙한 필체예요.
오늘 수없이 읽었던 천서의 필체입니다.

... ...뭐냐고, 이게...
어떤 새끼가 자꾸..., 장난을... ... (하지만, 이 필체는 분명.)
…어째서 편지의 받는 이는 우진이고, 보내는 이는 천서인가요?
그리고 그 글의 내용도 필체도, 마치 죽은 천서가 남기고 간 것만 같습니다.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교실을 빠져나옵니다.)
그 순간
덜컹, 창문이 흔들립니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흔드는 것처럼요.
덜컹, 덜컹… 이리로 오라는 듯이, 창문은 계속해서 흔들립니다.

아까 들었던 천서의 목소리가 겹쳐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요?

창 너머 운동장, 익숙한 교복을 입은 누군가가 보입니다.
그러니까… 천서가 웃으며 우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 기준치: | 59/29/11 |
| 굴림: | 17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이것도 환영인가요? 천서는 아까처럼 눈앞에서 또 사라질 것 같습니다.
만나야 해요, 너는 누구고. 이곳에는 왜 있고…
머릿속이 어지럽습니다.

...주천서! 거기 가만히 있어!
(그리 외치곤, 단번에 교실을 박차고 나갑니다.)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어서, 어서 천서에게 달려가요 우진.

(머리가 어지러울수록 뜀박질은 빨라집니다)
(이번에도 놓칠까봐, 그런 마음에 서둘러 운동장으로 향합니다.)
교실을 나와, 복도를 지나, 계단을 건너… 운동장으로 서둘러 나오면 그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헛것을 본 걸까요.
아까 천서가 있던 교문 쪽으로 가도,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사람 하나 없습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허망한 표정으로...)
... ...하아, 왜... ...
울음이, 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습니다.
무얼 기대한 건가요? 이상하고 맑은 날입니다.

...주천서... ... (겨우 숨이 정리되면, 그 이름을 느릿하게 부릅니다.)
(하지만 말을 이을 순 없습니다.)
(죽은 이에게... 어디 있느냐고, 묻는 건 이상하니까.)
(... ...그 말을 뱉으면, 정말 자신이 미친 걸지도 모르고.)
우진은 천서를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그리워했나 봅니다.
아니면, 장소에서 그리움이 증폭된 걸 수도 있고요.
해는 벌써 높이 떠 있습니다. 둘러볼 곳이 많아요,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
.
.
.

혼자 어딜 그리 급히 가려고?
누군가가 당신의 어깨를 덥석, 강하게 잡습니다.

꿈에서나 듣던 목소리, 웃음기가 가득한 그리운 목소리.
뒤를 돌아보면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천서가 보입니다.



어쩐지 울 듯한 표정을 짓는 천서가 말을 잇습니다.
5년 전, 그때의 모습 그대로예요.

| 기준치: | 59/29/11 |
| 굴림: | 30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 ... (대답 대신, 천서를 끌어안습니다.)
....이것도 꿈인가요?
그렇다고 하기엔 끌어안고 느껴지는 온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조용히, 힘주어 끌어안을 뿐입니다.)

뭐 힘든 건 없었고?? 왜~ ....어른되면 힘든 일 투성이라고 하잖아~

... ...괜찮아, 전부... ...나는... ...


... ... ...아니, 사실..., 하나도 안 괜찮아..., 힘들었어,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바보야. (눈물 대신 튀어나오는 것은 고해성사 같은 본심.)
... ...어른이고, 자시고... ...너 때문에 힘들었다고...
가려면 곱게 갈 것이지, 빌어먹을... 계속 꿈에 나오기나 하고... ...사람 인생 초치려고... ...잊혀지지도 않고... 넌...

....사람 인생 초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안잊혀지고.. ...그치.....
...............그래도 나는 우진아...
.....네가 보고싶었어

...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 (장난스러운 말이 이어져 울컥하다가, ...이어지는 말에 멈칫합니다.)
... ...
... ...누군, 안 보고 싶었는 줄... 알아.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 네가 그리우니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니까, 계속 엿 같은 꿈이나 꾸고.

... ...주천서...
나도 보고 싶었어... ... (결국, 훌쩍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더 감상에 젖고 싶긴 한데... .....시간이 많진 않은 것 같아서...
가고 싶은 데가 좀 많거든~ ...우진아... .....같이 가 줄래?



... ...같이, ...있을 거지. (이런 말을 먼저 한 것은 처음이라, 어색하고... 민망한 듯 작은 목소리로.)

우리, 세트 취급받았잖아~
천서가 웃으며 내민 손을 맞잡습니다.

왈칵 마음이 쏟아져요.
보고 싶던, 5년을 그리던 그 얼굴입니다.
환영, 귀신, 유령… 그 손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떠한 것이든 상관없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서로 잡은 손을 보며 천서는 환하게 웃습니다.
겨울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데도 손만은 따스해요.
5년 만의 재회입니다. 아니, 이걸 재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천서는 분명 5년 전에 죽었는데.
손을 잡은 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아까 그 골목길을 지나고, 다시 거리로…
머릿속은 어지럽고 손의 온기는 다정합니다.
어찌 되었든 상관없을 거예요.
잠시 복잡한 생각을 버려둡시다.
해가 지면 이곳을 나가야 하니까요.
확실한 건 하나, 당신의 손을 잡은 이는 5년 전의 천서라는 것.

... 옛날에, 자주 갔었는데...
... ...그때도 너랑.

.......같이 다시 오고 싶은 거 있지?



... ...어렸을 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별로 관심 없었거든.

... 그런 것치곤 맨날 가지 않았어? (그 말에 갑자기 웃음이 크게 터지며)

... ...버릇, 이 된 거지.
너 때문이잖아. (괜히 툭)

.....엇, .......크크... ...미안~
그치만~ 재밌었지?

(천서를 가만히 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너 아니면, 친구도 없었으니까.
... ...재밌었지.




어차피... ...
... ...더는 연락 안 해.
... ... (조금 씁쓸한 표정이지만.)
...나 또 친구 없어.
앞으로도, 딱히 없을 것 같고.

........다시 많이 만들어둬... ...친구...




친구도 많이 만들고....~


재밌잖아, 크리스마스 파티.

... ...크리스마스...도, 싫어. 이젠.
... ...싫어한다고.


...내가, 어떻게...
... ...다른 사람이랑 웃고, 떠들고...
... ...네가 없는, 크리스마스에...
... ...

.......아~ 대화가 너무 어두워지는 거 싫다~ .....우진아, 재밌는 거만 생각하자. 응?
나 너랑 놀고 싶어~

...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입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죠? 가격이 저렴하기도 했고, 아주머니가 친절하시기도 했고….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텅 빈 진열대와 계산대가 보입니다.

... ...비어있네. 당연하겠지만.

........오! ....우진아, 이건 어때?
어린애인 나랑 딱~ 어울리는 거 같은데~
천서가 쪼르르 어디론가 달려가면,
유일하게 남은 뽑기 기계가 보입니다.

...쓸 수 있는, 건가?
동전을 넣고 돌리면 플라스틱의 캡슐이 나오는 형식이었죠.
모두가 떠난 마을에 버려져 가게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천서는 우진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그러니까… 한 번에 오백 원이던가요?


잠깐... (주머니를 뒤적입니다.)

| 기준치: | 40/20/8 |
| 굴림: | 67 |
| 판정결과: | 실패 |
(...)
(영수증 종이...)


| 기준치: | 40/20/8 |
| 굴림: | 75 |
| 판정결과: | 실패 |
(ㅋ)
(이번엔... 카드...)
... ...요즘 누가 동전을 들고다녀.
옛날이랑 달라, 요즘은. (이런 말.)
그래요 누가 요즘 동전을 들고다니겠나요?
주머니나 지갑 속을 뒤져 보아도 동전은 없습니다.






...그냥 흔들면 나오지 않나, 이런... 구식 기계는.



.....하아.. ...어쩔 수 없지... (뒤적뒤적..)

천서는 한참을 둘러보곤 여기 있었네.

작은 소리를 내며 뽑기 기계 아래 동전 두 개를 찾아냅니다.

(맞...나? 귀신.)

동전을 넣은 천서는 달그락, 손잡이를 돌려 캡슐 하나를 뽑습니다.
이어 나머지 동전을 넣더니 우진를 향해 고개를 돌립니다.




... (동전을 넣고, 손잡이를 돌립니다. 익숙한 동시에 낯선 감각. 실로 오랜만인.)


... ...불만있어?

...조금?
툴툴대는 말을 뒤로하고 손잡이에 손을 올리면 아까 천서가 잡았던 탓인지 미약한 온기가 느껴집니다.
오랜 시간 돌아가지 않았던 녹슨 손잡이는 조금 뻑뻑합니다.
힘을 주어 돌리면 달그락, 천서의 것과 같은 작은 플라스틱 캡슐이 나옵니다.


열어보면 두 개 다 유치한 구슬 팔찌예요.
고등학생 때도 이런 건 하지 않았지만…
천서는 마음에 드는지 한쪽 팔목에 벌써 끼고 있어요.

이런 건 요즘 애들도 안 할텐데... ... (하며 천서를 봅니다.)

....난 요즘 애들 몰라~ 그냥 해줘~ (다 껴주고는 얌전히 봤다)

(그대로 천서의 어깨에 툭 기댑니다.)
... ...그래, 해줄게.
... ...선물도 다 받아보고.


... ...여기가 철거 되고, 사라져도... 이 팔찌는 남아 있겠지.
사라져도... 이걸 보면 기억이 날 테고... ...
(눈을 감고 잠시 중얼거리다가.)
... ...옛날에, 네가 했던 말이 조금 이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러고는 팔찌를 보다가 중얼거리는 말에 우진이를 살짝 내려다보며)
무슨 말? ....뭐였는데?

...일어날까? 다른 곳도 보자며.

......치사하게~ 말 돌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일어나면서)



간판의 글씨는 벗겨진 페인트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떡볶이부터 온갖 걸 다 팔던 분식점.
가게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바랜 메뉴판은 자세히 보면 읽을 수 있어요.
어쩐지 그리운 메뉴들과 가격입니다.
기억해보면 사탕도 팔았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요?
이때가 좋았지, 옆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들립니다.
그 천서의 얼굴은 이 동네와 다르게 5년이라는 시간이 스치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때 그 모습으로, 지금 우진의 눈앞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난 학교 끝나고 먹는 떡볶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건 줄 알았어. (메뉴판을 보며 말합니다.)



그야..~ 좋아한다거나 먹으러 가잔 말 많이 안 하길래~

...용돈이 적어서. (민망한 듯 작은 목소리로.)



아~ 아쉽다. 좋아하는 거 알았으면 맨날맨날 사주러 가는 건데~

...너한테 얻어 먹긴 싫었어, 그때는...
... ... (어린 자존심 때문이었겠지만.)
...그러니까, 네가 사준다고 해도 거절했을 걸.

..........나는 같이 먹고 있는 것만 해도 좋았는데~

...세상에 맛있는 게 많다는 걸, 알아도...
...역시, 여기서 먹는 떡볶이가 제일 맛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아니면...,
...같이 먹는 사람이 없어서, 다 맛이 없는 건가. (그리 말하며 천서를 봅니다.)

......새로 같이 먹는 사람이 생겨야겠는걸...~



생길 일도 없어...



(질투 나서 소개 안 시켜줬단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

... ...나 좋다는 사람도 없고,



그 뭐더라~? ...만나려고 해야 사람도 생긴다고..~
마음도 열고... .......다른 사람들이랑... 지내봐.... .......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61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문득 잡은 천서의 손가락 끝에서 작은 빛이 납니다.
파스스, 빛가루가 퍼지듯 반짝이는 파편이 흩날려요.
시선을 느꼈는지 천서는 급히 손을 뒤로 숨깁니다.

... ... ...방금,
주천서...? 괜찮아?

뭐가~?

내가 잡는 거 싫어?

내가 언제?




마지못해 다시 잡은 손, 아까와는 다르게 멀쩡하기만 합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 ...주천서...


손... ... 안 놓으면 안 돼?

..............우진이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 알았어..... .....안 놓을게...

자꾸... ...나 떠밀지마.
다른 친구를, 사귀라 거나...
애인이 생길 거라고..., 하거나...
... ...왜, 자꾸... 내 의사는 존중하지 않고,
...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난... 그저...

...언젠가 괜찮아지면, 정리가 되면... 그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네가, 토 달 필요 없다고...



너도 알잖아...
.........나는....
철컹,
천서가 대답을 하기 전,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 먼 곳에서요. 철거가 시작된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자....
.........갈 곳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우진아... ....마지막까지 계속 나랑...



... ...알겠어.
...가자, 계속.

기억을 따라 걸어가면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있어요.
걸음 끝에 도착한 장소는 예전에 자주 둘이서 놀던 놀이터입니다.

...오랜만이네, 여기도.

작은 꼬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그네를 타며 떠들던 학생들도 많았던 놀이터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진와 천서 역시 늦은 시간까지 이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었죠.
미끄럼틀과 시소는 부서져 있습니다.
그네의 쇠줄은 녹슬어 본래의 색을 잃었습니다.
지금 타기에는 무리가 있겠어요.


두리번대더니 그나마 멀쩡한 벤치에 천서는 털썩 주저앉습니다.


옆자리에 따라 자리를 잡고 앉으면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그 침묵으로 수놓는 시간도 잠시.
사르륵,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흔들립니다.
하늘을 보면 햇빛과는 다른 빛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있어요.
맞잡은 손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 솔직하게, 옛날엔...
너랑 세트 소리 듣는 거 싫었는데.
잘난 너랑 비교 당하는 것 같고... ...위축되는 기분이고.
세트가 아니라, 덤 같은 느낌이 들어서...
... ...그래서, 네가 미운 날도 많았고...



.......그치만 미워했다는 건 좀 충격~ ....난 매일매일 우진이 너를 진~짜 좋아했는데...



(한참 머뭇거리다가)
...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네 옆에 있기에 내가... ...부족한 것 같아서...
...친구라는 건, 동등한... ...위치여야 할텐데...
...내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 ...

뭐가 죄지은 거 같다고...... 그런 생각을...
........우진아 난 네가.. 나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 ...

........그게 잘못된 건 아닌가.......

... ...무슨 뜻이야?


... ...주천서, 난... ...
... ...역시... 아직, 너를... ...못 보내겠어... (미련한 생각이라는 걸 알기에,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바닥으로 무력하게 떨어집니다.)
... ...그래서, 속상해.
네가 유령이거나, 환상이거나... ...하룻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 ...다시 보지 못해도, 어쩔 수 없지만..., 처음부터 각오하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

너는, 내 첫 친구였고... ...마지막...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 ...너는, 정말 괜찮아?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고, 너와 그랬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 ...그러다가, 아무렇지 않게... ...너를 기억에서 지워가도... ...그래도 괜찮냐고.
... ...

.......응... ....난 괜찮아.. 우진아... ...........네가...
다른사람들이랑... 이전처럼 웃고 떠들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잊고.......
크리스마스에도 행복하고.... 웃는 나날들만....

너무 널 만나고 싶어서....



... ...천서야, 난... ...널 잊을 생각이...
... ...왜, ... ...
... ...내가, 너한테 못되게 말해서 그래?
계속... 괴롭히고, ...
싫은 소리만 하고...

... ...미워, 했다고 해서... ...
... ...그래서, ... ... 똑같이 마음 상하라고, 이러는 거야?

나는 진심으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나는......... 그래서....
...........계속 너한테 말해주고 싶었어....
늘 여기에서....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꿈뻑, 천서가 말할때마다 눈꺼풀이 무거워집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벤치.
수마가 몰려오는 이유는 다정한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인가요, 아님 손을 토닥이는 다정한 누군가의 손길 때문인가요.
다시 깨어나면 사라질 것 같은데, 애써 눈을 뜨려 해도 자꾸만 몸의 힘이 빠집니다.
동시에 애써 뜨고 있던 눈이 스르르 감겨요.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으면서도, 들리는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기만 합니다.

........너한테.... 저주를 건 것 같아....
나는... 네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그리고 그 슬픔의 이유가 되는 것도 싫어....
.............그러니까.. ...우진아... .....잘 자.. ...꼭 좋은 꿈 꿔....
툭, 그 말을 끝으로 우진의 머리가 천서의 어깨로 떨어집니다.
의식도 다시 꿈속으로 떨어져요.
우진은 아까 전의 낮잠보다 조금 더 긴 잠에 빠지게 됩니다.
아주 상냥한 손길과 함께요.
.
.
.
.
.
.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정신을 차리면 우진은 아까 그 놀이터가 아닌 어느 골목길에 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기준치: | 59/29/11 |
| 굴림: | 52 |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또 천천히 숨을 내쉬고….
골목의 담벼락은 담쟁이넝쿨 하나 없이 깔끔합니다.
교복을 입은 천서가 우진을 바라봅니다.
손에는 돌을 들고 벽에 무언가를 새기고 있어요.
우진이 역시 교복을 입고 있고요. 손을 쥐었다 피면 감각이 없습니다.
아, 다시 과거에 머무른 그 꿈일까요.


... ... (잠시 멍하게, 담벼락을 쳐다봅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천서는?)
(... ...모르겠다, 전부... 꿈인가?)
(계속... 이 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난... ...)
... ...너한테도, 큰 돈이잖아... ... (그때, 이렇게 대답했던가.)

천서의 얼굴은 벤치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어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담벼락에 돌로 무언가를 새기고 있어요.
장난스러운 그 표정에 잠시 이곳이 꿈이라는 걸 잊게 됩니다.
아니, 오늘 우진이 겪은 모든 일이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에게서 온 편지와 다시 만난 천서, 자꾸만 이상하게 흘러가는 오늘 하루…

함께 새겼었던 그 낙서, 골목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글을 모두 새긴 천서는 우진에게 걱정하는 낯으로 다가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 ...어디로, 갈래... ...



.........알았어... 돈은.. ...내가 마련할게..~ 그러니까 울지 마... ...평소엔 바늘을 찔러도 안 울 것처럼 했으면서..
...그...그렇게 싫었어...? ........그럼 국내 여행도 많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토닥였다)

(울음을 삼키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 듯 연신 눈물을 닦으며...)
... ...전부 다, 나랑... 같이 해...

그래그래~ ...내가 강우진 아니면 누구랑 이걸 다 같이하겠어~ 그치?

... ...나도, 너 아니면...
...같이 할 사람 없어... 평생... ...
... ...그러니까, 계속... ...
나랑... ... (닿지 않을, 말인데.)

........걱정마~ 평생 같이 해줄게~ .....어디보자...



...널 사랑하나보지, 바보야. (그렇게 말하고, 남은 눈물을 닦아내며.)
... ...매년, 가자.

...흐음~ 이렇게 놀려먹는데도 좋아서 옆에 있는 거 보면.. ......나도 널 사랑하는 거 같기도 해~?



... 듣기 나쁘지 않네, 그 말.

...........노.. ...농담했다가 더 당했네...... .........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을 쭉 피했다)

난 아닌데...

............내... 내가 강우진이랑 같이 한 19년 인생 중에... ...곧 20인가? ........그중에 지금 나한테 한 장난이 제일 나빠...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계속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중얼거리며 말했다)

... ...그래. 내 진심 같은 거...
너는 평생 모르겠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거고.
...그렇지? (언제 울었냐는 듯, 씩 웃습니다. 오히려 개운해보이는 표정으로.)


(‘졸업 후, 강우진이랑 주천서는 여행을 갈 것. 어길 시 벌금 100만 원.’ ... 그 아래로.)



(어길 시! 1000만 원 벌금 추가~!)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말을.)
(닿지 않을 말을.)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사랑해, 주천서.
...농담 아니야.


싫으면 미리 천만원 준비해.



나참, 쓰기전에 말했어야지...~




우진이 네 고백.



... ...

.......나도 생각이란 걸 하고 있을 때가 있다고?
.......진지한 마음엔 나도 진지하게 대답해줘야지.
신중하게~

... ...진짜야. 대답, 안 해도 돼.
...못 들은 걸로 해줘.
... ...
...나만 좋아해도 되니까.





멋대로 말했는데
나도 멋대로 대답하고 싶어.

... ...

이럴 거 알고 있었잖아? (그렇게 말하며 잔뜩 장난스레 웃었다)

(손 끝을 살짝 잡았다가, 힘없이 놓습니다.)
... ...그만, 가자.



고백에 대한 답변준비.. ...여행준비.. ..꽃... ..... ......
미래를 모르는 이의 말은 막연하고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라는 건 없었습니다.
그 익숙한 행동과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 왈칵, 눈가가 시립니다.
오늘 수없이 걷던 그 길을 다시 건넙시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그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간판의 색은 바래지 않았고, 떨어져 나간 콘크리트 벽도 없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좋다고 하는 거 아냐, 바보야.
(그렇게 말하며, 문방구로 들어갑니다.)

편의점이나 마트를 두고도 학생들이 자주 이용했던 문방구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아주머니도 친절하시고.
신중하게 볼펜을 고르는 학생이나 불량식품을 잔뜩 집는 꼬마 친구들이 보입니다.
진열대는 색색 무언가로 가득 차 있어요.
이제는 살 수 없는 그리운 것들입니다.


천서가 가리키는 것은 익숙한 뽑기 기계.
천서는 그 앞에 쪼그리더니, 주머니에서 오백 원 동전 두 개를 꺼냅니다.


해볼게?
천서가 돈을 넣으려는 순간
땡그르- 그 동전은 손에서 미끄러져 기계 아래로 들어가고 맙니다.
천서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바보, 속으로만 작게 중얼거리고.)
...동전..., 바꿔올까?
왁자지껄한 문방구, 뽑기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뒤에 줄을 지어 서 있습니다.
아쉽지만 동전을 바꿔오면 너무 늦을 것 같아요.


(다음..., 말이지.)
텅 비어있던 팔목, 뽑기 기계 아래로 들어간 동전.
문방구를 나가는 길, 몇 아이들이 익숙한 팔찌를 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 이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지네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나가자.




다음엔 뽑아서 선물해줘.



...하~ 그래, 커플 아이템. .......뽑기보다 더 대단한 거로 나중에 선물해 줄게~
.......졸업하고 나서... 해야겠지만... ...알바라던가..~


...그래, 커플일지 우정일지.. ......졸업식 후에 결정해 볼까?

... ...마음대로 해.


... 이제, 어디 갈 거야?


... (그럼 고개를 끄덕입니다.)
... ...그러자, 나 떡볶이 좋아하니까.


(그리 말하곤 웃습니다.)



.......아니, 너무 좋다 우진아.
맨날 네가 고백데이면 좋겠어..~

...생각해볼게.
가자. (여전히 손목을 붙잡은 채로, 분식점으로 향합니다.)

하교 후 집에 가기 전,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인심 좋은 분식점입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새로 뽑은 듯 코팅이 번쩍이는 메뉴판에 익숙한 메뉴들이 보여요.
바래어 보지 못했던 메뉴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 아.
(평소라면, 거절했을 말.)
... ...정말?

그나저나... 사준다 해도 안 먹더니...
......고백데이가 좋긴 하다 우진아. (계속 실실 웃으며)

나 많이 먹어, 바보야.

푸핫!! ....많이 먹으면 좋지~ 나 돈 많아? (그렇게 말하고는 웃으며 지갑을 꺼냈다)
우진이 네가 푸드파이터가 되어도 내가 책임지고 먹게 해 줄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 천천히 메뉴를 고릅니다.)
(많이 먹는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고르는 것은 컵볶이 정도겠지만.)

하지만 우진과 천서의 차례가 되면…
미안하다는 듯 아주머니는 머리를 긁적입니다.
오늘은 들리는 학생이 많아 금방 다 떨어졌다고 해요.
대신 손에 작은 사탕을 쥐여주고, 다음에 다시 오라는 말을 남깁니다.


오늘따라 되게.. ...뭐가 안풀리네...
컵볶이라도 먹고 싶었는데....



갑자기 솔직해지니까, 불운이 따라온다거나.



........아~ 농담..~
그치만..? ...친...구...(라고 해도 되는 건가 눈치를 잠깐 보더니)의 부정적인 말을 보면... 걱정도 되고~
.... 그런 거잖아?

...난 원래 극단적이고, 부정적이었는데?
너랑 다르게... 말이야.
... ...피곤하고, 예민하고, 까칠하고...
... ...항상 그랬는데.
... ... (잡았던 손목을 놓습니다.)

... (불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 ...네가 겪었던, 겪을, 일들도.)

....난 강우진이란 사람의 좋은 부분밖에 몰라서~
맨날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 말해도.. ...하나도 안 와닿네요.
...그리고 뭐가 전부 너 때문이야?
동전을 놓친 것도 나고... ...먹을건 그냥 내일 와서 먹으면 되는 건데~

...그럴 기회가 더는 없을 수도 있잖아.
만약,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왔다면...
아무것도 안 놓쳤을지도 모르고...
...아, 역시... 안 되겠어...
...내가 네 옆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 다른 사람이랑 있는 거 난 사실.. 너만큼 재밌지 않아...

...나보다, 더, 좋은... 친구들이 있잖아.

.......넌 아녔어?
나만 착각한 거야?





... ...미안해, 천서야...
...이상하게 굴어서 미안...
...갈게, 그만... 그만 갈게, 난...

.......... (그렇게 말하면 우진이의 손을 붙잡으며)
..........오늘... ...나는 강우진이 끝까지 있어주면 좋겠는데~
봐봐~ 문방구에서도 퇴짜, 분식집도 퇴짜~
그랬는데 너까지 퇴짜맞으면....
나 오늘 최악의 날 되는 건데~

... ...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다가)
... 알, 겠어... 미안해...
... ...


... ...

.....아무튼 긍정적인 말을 해주면 좋겠어...~
고백데이라며..? ...우진이 네가 솔직하게... .....나랑 있는 게 좋다고 해주면 좋겠어...



너랑 있는 게, 싫었던 날 없었어.
...전부 좋았어.
...지금도, 그래.
... ...그래서 떨어지기 싫어.
... ...같이 있고 싶어.

나도 그래.

그렇게 말하는 천서는 환하게 웃고 있어요.

... ...응.
하늘은 이제 노을로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가로등도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합니다.
색의 온도와 반비례하게 기온은 떨어집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입김.
꿈이라 그럴까요, 춥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놀이터라도 들렀다가 갈까?
졸업하면 왠지..~ 어른이 된 것 같고..~ 다시 오기 힘들지도 모르잖아~

꿈속의 천서는 우진의 속도 모르고 태평히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쉽게 거절할 수는 없었어요.
눈을 뜨면 전부 사라질 것들이라 지레 겁을 먹게 됩니다.

(손을 힘주어 잡습니다.)

둘은 노을을 등지고, 어느새 키보다 길어진 그림자와 함께 놀이터를 향해 걸어가게 됩니다.
...
작은 꼬마 친구들뿐만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모여 떠들기 바쁜 학생들이 많습니다.
이미 미끄럼틀이나 시소, 그네는 전부 차 있어요.
남은 건 페인트칠을 막 끝내 신문지가 덮인 벤치뿐입니다.
천서는 그 벤치를 손으로 꾹 눌러 묻는 것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다 마른 것 같아요.


할 얘기가 더 있어?

.....너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레 벤치에 앉고는 옆자리를 톡톡, 반대편 손으로 치며 빤히 봤다)

... ...나는, 듣는 쪽이었잖아.
... ...너는, 말하고.


...내가 말이 많았지.
... ...

....내가 말하는 거.. 싫었어?

...좋아한다고, 했잖아.
... ...
...좋아한다고.


...나를 봐주는 눈이 좋아.
네가 말할 때, 나를 똑바로 봐주니까.
...네 목소리도, 좋고.
...그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 ...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네가 가지고 있어서.

네가 나를 보고, 불러주면... ...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도...
조금은 좋았어.
... ... (말을 마치면, 시선을 돌립니다.)

.........어째서 오늘...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솔직히.. ....혼란스러워...... ...............너는 내가 알던 우진이가 맞나.. ...싶을 정도야....

만약, 내가...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채로...
...우리가, 졸업 이후로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잖아.
약속이라는 건,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 ...
우리가, 바라지 않아도...

... ...
...또 극단적인 생각, 한다고...
싫어할 거야?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진아...
....물론 난 안 그러겠지만.. ...만약,
우리의 상황이 달라져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면...
.......나도 후회할지도 몰라....


........아니다, 이 말은 졸업식 때 할래.
지금 하게 되면... .........안될 거 같아서...

...왜, 불공평하게.
난 지금 고백하고 있잖아.

졸업식 날 이후에 못 볼 수도 있잖아.
그때까지...
대답을 기대해 줘야지.



... ...
...기대해도 돼? (웃고 싶지만, 웃을 수 없어서 표정이 굳어집니다.)

그때 가서 말할 거니까.
.....그러니까... ....나 기다려주라 우진아.

...알아, 너도 나 좋아하는 거.
그러니까... ...기다릴게.

....더 기다리게 하면 안 되겠다.. ...그치....
..........그때 꼭........... 대답해 줄게.

...기다리게 한 만큼 멋있게 대답해. 감동적으로.
엄청, 기대하고 있으니까.

.........그정도로 기대하면 오히려 실망하던데..~

로맨틱하게.


뭐, 그럴수도 있겠고...
근데...
(바짝 코 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하고) ...주천서 넌..., 얼굴이 다 하니까 괜찮지 않냐?
멋있고, 감동적이고 로맨틱한데... ...별 걱정을 다 하네.


한, 5년 정도 예습했어.

.........5년이나? 나 몰래?



...더 오래.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는데...


평생 비밀로 하려던 거, ... ...그냥, ... ...
... ...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런거라면 내가 맨날 강우진 집 앞까지 가면 되는 거지..~
이야기가 길어지고, 붉은 노을은 어둠을 이끌고 산 너머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데도 있었는데...
미뤄뒀다가 졸업식 때 보여줄래.


이것도 같이 비밀로 하려고~

...그러던가, 바보야.


(괜한 농담을 하면서, 어둠이 깔리는 풍경을 봅니다.)

우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날 둘은 해가 지고 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였죠.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 눈이 녹고 꽃망울이 열리는 졸업식의 해.
천서는 오지 않았습니다.
사진 속의 얼굴은 낯설기만 했어요.
그 앞에서 몇 번이고 무너졌던 기억이 다시 떠오릅니다.

...크큭.. ....알겠어 알겠어~ ..........다른 방법을 준비해 볼게~ (계속 소리내서 웃고는)

...그래, 천서야.
... ...있잖아.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진짜 이상하네 강우진...~
평소엔 그런 거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꼬옥 안아줬다)

(마주 안은 채로, 천서의 품에 기댑니다.)


...응.
... ...사랑해.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맛집 투어도 할거고...
.......뭐더라... ......놀러 가기 좋은 탑텐...? ......친구들이 알아오겠다고 그러더라고....
..........다... ...같이 가자.....
...........


............. 흐흐......... 놀러 가는 곳 중에 선 운동신경 필요한 곳들도 있다던데...
.......그런데도 다 같이 갈 거지?

네가 원하면, 전부.
...가줄게.
어디든.

........ 웬일이래...~ ...........밖이라면 질색하는 강우진이....


.............................나도 그래....... (폭, 우진이 품에 안기며 들릴까 싶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
... ... (그래서 미안해, 사랑해서. 그런 말은 삼키고.)
... ...돌아가자, 날이 추우니까.
...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바보는 감기에 안 걸리지만...~ ....똑똑한 우진이는 감기로 고생할지도 모르잖아~ (살살 웃으며 품에서 떨어졌다)
놀이터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몇 없습니다.
해는 완전히 지고, 거리를 밝히는 건 가로등뿐입니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들이 폴폴 나오고 있어요.

| 기준치: | 75/37/15 |
| 굴림: | 26 |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깜빡, 그 가로등의 빛은 불안하게 꺼졌다 켜지길 반복합니다.
가로등에서 퍼져나오는 빛줄기가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뒤를 돌아선 환하게 웃는 천서의 모습이 안개가 낀 듯 경계가 모호해져요.
안녕, 안녕… 분명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본 천서는 맑게 웃고 있었습니다.
5년 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요.
우진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립니다.
여전히 다정하고, 오늘 하루는 계속 곁에 맴돌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집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요.
어디론가 떨어졌던 정신이 차차 돌아옵니다.
.
.
...
...

다시 깜빡, 눈을 뜨면 벤치 앞.
쪼그려 마주 앉은 천서가 보입니다.
몽롱한 한 정신과 돌아오지 않는 현실감. 꿈에서 깬 걸까요?
여긴 정말 현실이고, 방금은 꿈이고…

... ... 아... ...
그 얇은 경계선에 우진은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하늘은 붉어요, 노을이 지고 붉은빛이 상처처럼 하늘을 물들입니다.
우진의 옷도 교복이 아닌 처음 입고 온 그대로예요.
꿈이 아닙니다.





...어떻게 돼?

그렇게 말하며 천서는 우진에게 손을 내밉니다.
하지만… 천서의 손 절반이 흰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되는 건지... ...


(입술을 꽉 깨물고, 천서의 손을 잡습니다.)
... ...

손이 닿자, 오늘 몇 번이고 본 빛처럼 부서져 흩어지는 그 손.


| 기준치: | 59/29/11 |
| 굴림: | 89 |
| 판정결과: | 실패 |
1
따스하지만 그 흰 부분은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천서를 집어먹을 것처럼, 이 빛처럼 천서도 부서질 듯이.
빛은 벌레가 잎을 먹듯 천서를 좀먹고 있어요.
그저 보여줄 곳이 있다고, 빨리 가자며 재촉할 뿐이에요.

| 기준치: | 10/5/2 |
| 굴림: | 79 |
| 판정결과: | 실패 |
... ...
보여줄 곳이, 어딘데?

... 마지막이니까
어째서 사람은 예정된 이별을 느낄 수 있는 걸까요.
마지막, 그 익숙해질 수 없는 단어가 머릿속을 헤집고 어지럽게 합니다.
이번에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헤어질 수 있겠죠.
눈가가 시린 이유는 찬 겨울바람 때문일 겁니다.
천서는 손을 잡으며 익숙하게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철컹, 그리고 와르르.
또 먼 곳에서 어느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
골목을 지나, 위로 향하는 돌계단을 지나, 오솔길과 처음 보는 건물을 지나…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는 천서의 뒤를 따라가면 처음 보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옆에는 저수지가 있으며, 언덕 아래로는 마을 풍경이 전부 보이는 높은 이곳.
마치 전망대 같습니다.
길게 늘어진 검은 전깃줄이 오선지의 악보처럼 이어지고, 또 모든 건물은 울긋불긋한 노을을 머금는 중입니다.
노을 탓에 마을 전체가 불이 난 듯 붉게 물들고 화사해집니다.
문득 본 천서의 몸은 발목까지,
그리고 손은 또 완전히 빛이 되어 반짝… 흩어지고 있습니다.
사라지고 있어요.
물어볼 게 많습니다.
속에 꾹 담아둔 말들도 많아요.



..............만나서 반가웠어 우진아.....


노을을 지고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역광이 진 그 얼굴은 왜 마냥 슬프게 느껴지나요?

...5년이나, 지나서... 말이야.

......아까 물었지?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보는 바와 같아... .......이 빛이 사라지면... ...나도...
...........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싫어, 주천서...
...왜? 같이, ... 더는...
... (아니, 당연한 거지만... 그래도.)
...계속 같이 있었잖아, 오늘...
...너랑, 이렇게...

네 미래에서 함께할 수 없는걸....

... ...



.......널... ...널 너무 보고 싶어서...


근데... .............다 가버렸어....
난 여기에 계속.. ...있었는데....

...미, 안해...

.....네가 왜 미안해...? ............당연한 일이었어.
나와 너는.. ....가는 길이 달라. 우진아...
난 그냥...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 ...나도, 인정... 하고 싶지... 않은데...

나도... ....나도 미련이 남았었어.......
네가 너무 좋아서.......
죽어서도........ 계속...
이 자리에.........
................


여긴... 곧 철거될 예정이고...
나도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어...
그러니까... .......이건 마지막 작별인사야, 우진아.
......누군진 모르겠지만... ....신이 주신 단 하나의 기회 같은 거지....
........나더러 가장 아름다운 마지막을 보여달랬어....

...나한테서 마지막을 말하고 싶은 건...
너 하나뿐인데...
....... 몸이 생기고...
펜을 잡을 수 있게 되고....
그 순간 내가 편지를 쓸 상대는 정해져 있던 거야...


만약, 내가...
... ...조금만 더 빨리...
...너에게..., 솔직하게... 말했다면...
... ...그랬다면...
... ...

......이 미래는... ....달라지지 않았어....
난.. 죽었고, 넌 살아있어...
오히려 솔직하게 말하지 않아 줘서 다행이야....


그걸 생각하면... ...끔찍해서 편하게 죽지도 못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편지를 받고... 이렇게나 빨리 왔잖아....


........너는.... ....여기에 다시 와줬잖아....
..........그치만....
와줘서 고마워...



...작별이라고 하지 마... 싫다고.

...나는 해가 지면.. 사라질 거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보내기 싫어, 미안해...
난 원래 이기적이잖아, 너도 알잖아 그냥...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서, 억지라는 거... 알고 있지만...
...내가 붙잡을 수 없다는 것도...

...그래도...
... ...널, 좋아해서... 난... ...
... ...너를..., 보내고 싶지가...

계속 있고 싶은데...
..........그럴수가 없어....
다른 방법도 어디에도....
.........이것조차.. ...유일한 기적이었어...
맨날 여기 있어도 아무도.. 알지 못했으니까...


...혼자, 기다리게 해서...
... ...
외롭게 해서... ...
...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역시... ..., 내가... ...

... ...내가... ...외면하고 싶어서, 그래서...
... ...그런다고 널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넌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단지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이러고 있다는 게...
.......그게 잘못된 거야...

... ...그래도, 널... 만났잖아.
...알겠어, 이제...
...널 만날 수 있어서, 확실히 알았어.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지,
사랑했, 는지... ...그리고,

... ...묻으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잊으려 해도.
그럴 수 없겠다고.
... ...

.........우진아... ......제발.....
나는... ..........너한테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온 거야...

...근데 난 못 해.
... ...
널 보낼 순 있어.
이미 한 번 해봤으니까.
내가 후회하고, 힘들었던 건...

이제 알겠어.... ...내가 왜 5년이라는 시간동안 힘들고, 괴로웠는지.
왜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는지.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
계속 방황했던 거야.
그러니까, ... ...

...지금 솔직해지면...
...두 번째 이별은...
...조금 더, 편할테니까.
후회도 없고, 익숙해서 덜 괴로울 테고...
...너를 보내주는 방법도..., 조금 더 경험이 쌓이는 거야.

... ...그런, 거지...

...이별이 익숙해지면...
........그렇게 익숙해지다가.....
날 잊어주면 좋겠어.
......네 감정을 마주하고.. ...날 좋아한다고 생각해 봤자, 난...
더 이상 그 마음에 대답해 줄 수가 없어.

정해져 있다는 걸...
......그러니까.. ....나 이제 그만 좋아하고.. ....다른 사람도 알아보고......



하겠냐?
되겠어?

......... 안될 건 뭐야? ........................살아있는데?

그래? 살아있었으면... ...


... ...

.........그래...
......나라면 그랬을 거야 강우진...


이런 곳에서 뒤져버린 놈 따위....
......지금 너한테 포기하라고 하는 머저리 따위....
잊어버리고 살라고...........

...개새끼.
... ... (그 한마디와 함께 겨우 참았던 눈물이 터지면서.)
...나쁜 새끼... ...
... ...그럴거면 왜 날 부르는 건데,
다른 새끼랑 인사하지 그랬냐.

그냥 나도 여기서 확 뒤져버릴게.

.........난... 그냥....
......난 이제 괜찮으니까....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말을... ...



아직도 나를 몰라?
정 그러길 바라면 차라리... 저주를 했어야지.
죽어서도 지켜볼 거라고, 계속 귀찮게 할 거라고,
그렇게 안 할 거여도 나를 겁줬어야지.
그랬으면 미친새끼, 찰거머리 새끼, ...그러면서.

... ...
나, 억울해...
겨우 이런 놈 좋아했나 싶어서, ... 다른 사람이랑 행복하라고 하는... 그런...
바보 같은 놈을 왜... 좋아해서, 진짜...
짜증나서, 억울해서, 못 잊겠어.

...누군 하고 싶어서 하냐?
... ...어쩌라고, 내가 하고 싶다는데...
왜 뒤진 놈이 훈수질이야?

뒤졌는데도... .....좋아해서.....
나도 죽은 게 억울한데....
그런데도 좋아하는 걸 어떡해....
.....근데 안되잖아 우진아....
저주를 퍼부으라고 해도... ...난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편지 하나 쓴 머저리고....

이런 내가 널 어떻게 더 행복하게 해 줄지도 모르겠고...
이 와중에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날 사랑한다고 해.
그리고, 기다려줘.
....그거면 돼.
이곳에서 너를 본 순간부터...
...나는, 그걸로 행복했어.

...네가 쓴 편지를 제대로 받았잖아.
그게, 보답이 아니면... 뭔데?
... ...그러니까.
말해, 빨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헤어짐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애초에 천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요.
헤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연하지만…
무릎까지, 이젠 머리카락의 끝부분도.
부서지는 천서의 몸은 노을보다 더 밝게 빛납니다.
빛무리들이 우리 주변을 감싸요.

내가 너한테... .......마지막까지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
사랑해, 강우진
..............난...... .......너를 계속....
아니.. ...너밖에...

..........하... .......멍청하다 나도....


.......바보같이.. ...이런상황에서 숨기려고 했던 마음이나 말해버리고...

주천서, ...내가 만약...
네가 죽기 전으로 돌아가서...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도, 너는...
이 대답을 들려줄 거지?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너 빼고 모두 다 알았거든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진짜 바보는 나였네, 그치?
(따라서 웃고는)
... ...


이대로 만나지 못해도,


...그게, 내 꿈이거나... ...무의식이거나.
봐, 너는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아까 전 꿈에서 또 너를 만났어.
그때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네가 기뻐하는 걸 보면서...

...진작 말할 걸 그랬다고
... ...그런 생각이 들어서.
네가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말할게.
똑같은 날이 반복 되어도.

앞으로 닥칠 일을 몰라서,
졸업식 날 대답하겠다고... ...그런 고집을 부려도.
재촉하지 않을게.
어차피 난 대답을 들었잖아.
... ...네가 사랑한다고, 지금 말해줬잖아.

...그래도, ...대답을 들은 거야.
그러니까... ...
나는 부질 없는 사랑을 끌어안고 있는 게 아냐.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마.
나도 너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어디서든 너를 만나면 기쁠 거야.
...너도 그럴 거잖아.
그러니까, 다시 또...
꿈에서 만나면 좋겠어.
... ...어려워? 이런 부탁도?

....다신 못 만날 수도 있어...
꿈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도....


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도...
점점 모두한테서 잊혀져갈거야


너한테 그래....

말했잖아, 아무랑도 연락 안 한다고.
그래도 난 널 끌어안고 있어, 혼자서.
... ...너를 추억하고 얘기 할 사람 따위 없어도 돼.
다른 사람이, 잊어도... ...씨발, 몰라.
...내가 널 안 잊겠다고, 같은 말 몇 번이나 반복하게 할 건데?

내가 가지고 있을게.
매일 기억할게.
(...손목의 팔찌는 여전히 있나요?)
(꿈이 아니라면...)
손목의 팔찌는 계속 있습니다.

...그래도, 네가 준거니까...


... ...

중간중간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해가 짐에 따라 그 소리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합니다.
이젠 정말 헤어질 때가 온 걸까요.

우리의 겨울은 유독 시리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서는 오랜 시간 우진을 응시하곤 천천히, 아주 느리게 입을 뗍니다.



…그렇게 말하던 천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요?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애원하듯, 목소리가 잘게 떨립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이별에는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영 잊는 건 또 다른 의미죠.
목이 메는 듯한 기분에 숨이 턱 막힙니다.

...무슨 뜻이야?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이렇게 잔인할 필요까지 있나요?


.......우진이 네가 잊을 수 없다면...
.........내가 잊게 해줄게....



...네가 지금 사라지든 말든, 네 머리 통을 치고 내 기억을 잊게 해줄 수도 있어.
... ...그러니까 진짜 미친 소리 그만해.
내가 지금 고백... 하, 씨...
고백의 수준이냐? 너 사지 멀쩡하면 이거 프로포즈야, 씨발.
반지 대신 팔찌에 맹세한다고 지랄하는 거야, 지금?

......이대로 가면... ....넌 계속.. ...내 기억 때문에 일상을 못 살게 될 수도 있어...
나도.. ........멋대로 네 꿈속을 드나들었고...
아마도 그것때문에.. 평생...
...내 괴로운 기억이 너를...
..........


나도...
.......그치만.. .....
........넌 정말 괜찮은 거야? ...평생...... 나 같은 거한테...
....곧 사라져 버릴 텐데...........

...끔찍한 건,
괴로운 기억은...
네가 아니고 나야.
... ...
드디어 말했잖아.

... ...잊고 싶지 않아.

내가...
너한테 있어서 저주가 된다 해도...
(그렇게 말하며 살짝 입을 맞췄다)
다정하게 맞춘 입은 이제 형체가 없습니다.
그저 따스한 빛만이 우진을 감싸고 있어요.

천서의 눈에서 떨어지는 건 그 수많은 파편 중 하나겠죠.
미처 삼키지 못한 눈물은 아닐 겁니다.
행복하길 바란다고 합니다.
우진이 더 이상 슬퍼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들에 새겨진 진심은 깊어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5년의 기다림, 그리고 마지막 부탁이 망각이라면 우린 너무 슬픈 이별을 맞이하는 게 아닌가요?
마지막 안녕 역시 잊히고 말 것입니다.
천서의 이름 한 획부터, 다정한 목소리까지도.
두 번째 이별을 앞둔 사람의 표정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천천히 기울어진 해는 누군가가 없는 내일을 향해 떨어져요.


나도... 널.
... ...

영원히...
.....내가 소멸하더라도....

뭐, 그 전에...
만나겠지... 바보야.
... ...
(조심스럽게, 빛을 끌어안고.)
... ...어쩌면 금방일지도 모르잖아.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꼭.. ....다시 만나는 걸 기다리고 있을게...

... ...다른 사람이랑 만나고, 행복하고, 잘 지내고... 그런 거 보고 싶어 하지 마.
... ...바라지도 말고.

......나 없이 잘 지내지 마...
...다른 사람도.... 만나지 말고...
.........나 사실....
......질투심도 심해...
.......그러니까....



.......사랑해 강우진....

... 천서야.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합니다. 그 목소리엔 미련도, 슬픔도 없어요.)

........평생... ....너만 사랑할게.... 절대 잊지 않고....
천서는 바스러지는 팔로 눈가를 벅벅 닦더니, 마지막으로 환하게 웃어 보입니다.
잊힌다는 것을 어느 누가 반가워하겠나요.
내색하진 않아도 천서는 두려워했을 겁니다.
정말, 자신의 존재가 소중한 이에게 잊힌다는 것이.
노을이 산 뒤로 완전히 넘어갑니다.
희미한 빛만이 남은 천서는 우진을 그러안습니다.
그 빛은, 그 온도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해 마음이 녹아버릴 것만 같아요.
잘 지내, 사랑해, 다시 만나, 그리고… 쏟아지는 말들이 점점 작아집니다.
우진이 품에 안고 있던 상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지탱하던 무게가 사라지자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입니다.
눈물이 고여 흐릿한 앞을 보면 완전한 어둠 속 넓게, 하늘로, 또 하늘로.
시린 겨울바람을 따라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이 보입니다.
손이 닿자 으스러지는 그 연약한 빛이요.
천서가 있던 자리에는 무언가가 놓여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뽑았던 팔찌, 그리고 저건… 꽃다발입니다.
졸업식 때 우리가 주고받기로 했던 그 꽃.
꽃들은 겨울과 어울리지 않게 화사하고 싱그럽습니다.
천서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못다 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그 상대가요.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것도 없는 이 언덕이 괜히 더 넓어 보입니다.
이제 나가야겠죠. 동네가 곧 완전히 닫힐 겁니다.
겨울, 우리가 다시 헤어진 계절.
영원한 봄을 기다리는 그 계절은 유독 시립니다.
천서가 남기고 간 꽃다발을 가만히 쳐다보면, 낡고 바랜 갈색 카드 한 장이 꽂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손끝을 간질이는 꽃들 사이 그 카드를 꺼내어 읽읍시다.
눈물이 나려는 것은 소중한 이의 익숙한 부재 때문이겠죠.
카드에 적힌 그 내용은…
우진은 매일 밤마다 천서가 나오는 꿈을 꾸게 됩니다.
반복되는 헤어짐의 꿈. 그건 악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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